- Today
- Total
나의 잡다한 세계
어케연합 제 1 합작 본문
마을의 유일한 성소, 교회가, 눈이 아플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였다. 난폭하게 이리저리 그 몸을 흔들며 작지 않은 나무 건물을 집어삼켰다. 그 끝에 남은 것은 오로지 부산물인 회 빛 재뿐이었다. 은하수가 불타올랐다.
:: 은하수 ; 신을 품은 이단자
푸른 홍채가 빛을 받아 빛났다. 주욱 찢어진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푸르렀다. 거울에 하늘이 비친 듯한 색의 머리카락이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빛솔은 그날따라 시원한 쪽빛 하늘이 거슬렸다. 그날은 두 달에 한 번 있는 교단 소집일이었다. 뭔 종교 행사 비슷한 것을 두 달에 한 번씩이나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해줄 수가 없다. 빛솔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냥, '믿음이 엄청 견고하다,' 정도로 생각했다.
빛솔은 소집일을 싫어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극도로 혐오했달까.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사람들은 소집일만 되면 빛솔을 귀찮게 했다. 뭐, 평소에도 상당히 거슬리는 게 마을 사람들이지만, 소집일에는 특히 더 그랬다. 빛솔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그를 닦달하는 이유는, 그것도 종교 행사 날에 특히 더 그런 이유는, 그의 쪽빛 홍채 때문이었다.
빛솔은 이미 체념한 지 한참이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짓을 하던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벌써 몇 번이고 체감했었다. 아마 주민들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며 기도나 해댈 것이 뻔했다. 어릴 적, 마을 공동의 헛간에 키우던 닭을 실수로 죽인 적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절대 그를 추궁하거나 혼내지 않았다. 다만 그 행동에 무언가 신이 의도하신 바가 있을 거라는 얘기만 한동안 소문 아닌 소문처럼 돌았을 뿐이었다.
마을 뒤편 언덕에 대충 널브러져 있던 빛솔은 무심코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소집에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마을이 난리가 날 것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 머리를 털고 나서 그는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단, 목적지는 교회였다.
빛솔은 도무지 교회 내부의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는 눈을 가만히 감고 앉아만 있는데도 그 분위기가 너무 텁텁해서 미간이 찡그려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견뎌야 했다. 만약 거기서 얼굴을 찡그린다면, 주민들이 신께서 노하셨다며 시끄럽게 굴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지금 빛솔 뒤에서 뭐라 뭐라 얘기하는 목사의 말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겠지. 그들은 원래 그랬다. 푸른 홍채의 아이를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눈치를 살폈다. 빛솔은 그냥 그게 불편했다.
사실, 신이라는 표현이 퍽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빛솔을 '신의 대리자'라고 불렀다. 잘은 모르겠지만, 밝고 맑은 푸른색 홍채가 마을의 신이 가진 특징임은 분명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빛솔을 신의 대리자라고 투영하는 걸 테고….
빛솔은 신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신의 초상화인지 사진인지 모를 액자가 교회에도 걸려있었다. 교회 내부에 있는 거대한 고해실에, 반투명한 검정 커튼으로 가려진 그 액자만 달랑 있었다. 의자도 없고, 창문도 없고, 탁자도 없지만, 그 액자는 있었다. 액자를 보면 그들의 신은 푸른 홍채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안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 실수 같은 것들을 모조리 말하게 하는 원인이 바로 그 눈이었다.
가끔, 빛솔은 그 액자의 눈 부분만 도려내어 태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만약 당신의 눈이 푸른색이 아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이렇게 갑갑하지는 않을 텐데. 당신은 왜 푸른색 홍채를 가졌어?
의자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도 무표정은 유지해야 이번에도 잘 넘어갈 텐데.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내던 중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자기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은 느낌.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빛솔은 마을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커튼은 쳐져 있지만 열린 창문 사이로 기분 좋게 불어 드는 바람. 그 바람은 그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간지럽혔다. 그는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있는지 알지 못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불쾌한 그 웃음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뭣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수전증이라도 생긴 듯이 손이 덜덜 떨렸다. 팔이 인형의 팔이라도 되는 양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반사적으로 일으켰던 몸을 앞으로 숙인 푸른 머리칼의 아이는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뭐였지. 누가? 왜? 소름 끼치던 그 웃음소리가 자꾸 걸렸다. 그리고 그걸 곱씹는 과정에서 빛솔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는 기필코 그 액자의 눈을 도려내든지 그 자체를 부수든지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왠지 멍한 기분이, 텅 빈 감정의 공간이, 바람을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변화는 생기기 마련인 것을. 특히 인간들의 군집에서라면 말이지.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뿐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교회라고 부를만한 건물이 하나뿐인 거였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교회는 뭘 생각하던 그보다는 컸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마을에 하나 남은 구식 건물이었고, 동시에 마을이 가장 부유했을 적의 마지막 흔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건물은 마을 외곽,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밤에는 그 근처에 아무도 없을 정도는 됐다. 빛솔은 그 시간대를 이용하기로 했다.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전체적으로 좀 창백한 빛이긴 했다. 빛솔은 밤중에 조심히 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낮에 듣기로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갑자기 기절한 건지, 고꾸라졌다나. 의사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더랬다. 그는 아무래도 그 웃음소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청색 홍채를 가진 아이는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마을 외곽의 교회 건물로 향했다. 제 딴에는 저주인 모든 것의 원흉을 마주하러. 누가 봤다면, 도둑으로 오해했을지도 몰랐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본인인 게 밝혀지면 또 그냥 넘어갈 테니까. 빛솔은 그날따라 밤바람이 덥다고 생각했다.
교회 건물은 꽤 낡은 건물이었다. 목표는 그나마 리모델링 비슷한 걸 한 적 있는 고해실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 건물은 낡아서 문을 열어도 끼익, 발만 내디뎌도 끼익-하는 그런 곳이었다. 다른 마을 어린 애들이라면 담력 시험 장소로 이 건물을 골랐을 정도로, 밤에는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빛솔은 끼익, 문을 열고 조심히 교회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교회에, 그것도 낡은 교회에 '몰래' 들어가는 건 꽤나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신의 대리자 어쩌고 하면서 받들어져도, 신의 동상이나 사진 같은 거 대신에 사람들의 믿음을 형상화하는 매개를 연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당장에 교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몽유병 정도면 사람들도 믿어주지 않을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모든 일의 대상이 자신인 이상, 피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에 제 발로 찼아간 그가 드디어 접신한 거라거나, 뭐 그런 얘기가 돌겠지. 빛솔은 그렇게 갈등하다가 갑자기 지금이 아니면 죽도 밥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서 - 건물 바닥에서 나는 끼익 거리는 소리는 덤이다 - 고해실 문에 닿았다. 문고리에 떨리는 손을 올렸다. 이제 '이다음' 같은 건 없는 거다. 문을 열었다.
어린아이가 있었다. 새파란 벽안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는 아이의 맑은 청벽색 홍채를 보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축하했다. 아이가 눈을 깜빡이면 그 눈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아 그 눈이 유리구슬과도 같다고 말했다.
아이는 신을 모시는 마을에서 태어나 아마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반강제적으로 신을 받드는 일을 했는데, 커서는 크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이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망할 홍채의 색 때문에 마을에서 모시는 교종으로서 자랐다. 물론 아이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그들이 받드는 형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이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싶어했다.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끝내 마을의 교종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아이는 목표에 다다랐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사람들의 믿음은 그가 바라던 것을 이루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교회에서부터 파도처럼 넘실넘실 흘러서 마을 전부가 잠길 정도로 그들의 믿음은 부풀어 있었다.
아침은 왔다. 시간이 멈추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빛솔이 사실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이단자라는 소문. 그들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소문. 물론 그걸 믿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은 자라나고 있었다. 간밤에 빛솔이 고해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된 참이었다. 의자도 없고, 책상도 없고, 뭣도 없는 방에서 사람 하나 넘어진다고 그렇게 큰 소리가 날 리 없지만, 교회 근처에 사는 사람 몇몇이 쿠당탕-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발견한 거라고 했다.
빛솔은 한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잠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길었냐면, 일단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는 일수 만큼 잠을 잤다. 또, 발가락까지 다 접어도 셀 수 없는 날만큼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 두 명이 그렇게 해도 모자랄 만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동안은 밤이 오지 않았다. 빛솔은 그다음 종교 행사 날에 깨어났다. 그건 이상한 소문을 사그라뜨리기에 충분한 입김이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빛솔은 어딘가 다른 사람 같았다.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처럼, 눈에 이 세상이 비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독실한 신자처럼 살았다. 아침 기도를 꼬박꼬박 드렸고, 저녁에도 기도했다. 허공에 대고 자주 혼잣말을 하는 건 덤이었다. 사람들은 빛솔이 정말 신을 만나고 온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주 맞는 말도 아니었다.
빛솔은 눈을 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을 쫓아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다. 매우,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일. 오늘만 지나면 다 잘 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낡고 오래된 목제 건물을 태우는 건 어렵지 않다. 불만 붙여도 잘 타겠지.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일을 그르치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 기름을 부어놓으면 훨씬 더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빛솔은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야가 흐렸다. 빛솔의 집에는 안경이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네. 빛솔은 기름통과 성냥갑을 챙겨 들었다. 기름통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봤고, 성냥갑에 성냥이 충분히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빛솔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기름이 통 안에서 작게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그 덕분에 도착할 즈음에는 기분이 좀 나았다. 모든 걸 끝낼 시간이었다. 이걸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아이는, 아니 소년은, 교회에 들어가 기름을 부었다. 꼴꼴. 그다음에는 성냥을 틱 그어서 불을 붙였다. 붉은 불꽃이 퍽 예뻤다. 기름은 교회 문 앞까지 흥건했다. 찰박. 기름을 밟고 건물 밖으로 나온 소년은 교회를 바라보고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정말 끝이야.
소년은 타오르는 성냥을 기름에 던졌다. 불길은 삽시간에 몸집을 불렸다. 건물은 불길에 집어삼켜졌다. 바라던 바야. 비틀린 미소를 짓던 소년은 눈을 감았다. 전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빛솔은 고해실에서 신을 만났다. 액자에 대고 소리를 질렀는데, 신이 뒤에 서서 그를 불렀다. 넌 이름이 뭐니? 아, 네가 이번 세대 '대리자'구나. 아, 니가 바로 그 '신'이야? 별거 없구만, 넌 왜 신이야? 왜 푸른 눈을 가져서 날 힘들게 해?! …이번 세대는 좀 불만이 많네. 미안, 하지만 벽안은 내가 갖고 싶어서 가진 게 아니라서 말이지. 너도 그렇잖아?
사실 '신'은 액자의 사진과는 좀 다르게 생긴 것 같았다. 뭐 어때. 본인이 직접 나타나 주셨는데. …알 바야? 나는 저 액자를 없앨 거야. 그러면 너도 사라질까? 에이, 그럴 리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필요 없어.
'신'은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재밌다는 듯이 웃었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기억 속의 그 웃음이 맞는 것 같았다. '신'은 말했다. 나도 너 같은 꼬맹이일 뿐이었어. '신'의 노란 머리칼이 흩날렸다. 창문이 없는 고해실에 바람이 불었다. 쿡쿡. 계속 웃어댔다. 그리고 정말 웃긴다는 듯이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내 이름은 케빈이야.
낮은 밤을 삼켰다. '신'은 자신이 만들어 낸 그 아이를 먹었다.
아, 시나리오가 여기서 끝나. 연극은 끝났어. 그래, 뭐. 이제 다시 시작할 거야. 이번에도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실패했거든. 벗어나는 데 너무 오래 걸렸어. 시간을 좀 낭비해 버렸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뭐? 극본을 누가 썼냐고? 물론 내가 썼지. 그건 왜? 이름? 내 이름은 케빈이야. 정말 끝이야. 더 없다고. 다시 처음부터 해 볼 거야. 언제쯤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어. 원하면 이다음 연극도 봐도 돼, 아직 주연은 못 정했지만.
...다음은 누구로 할까.